-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리고 소년과 그 불확실한 시간
- 1980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에서 시작하여 2023년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 까지 걸린 시간이 햇수로 무려 43년.
이야기 속의 소년이 중년이 되는 그 시간이 그 쯤 될 것 같아 묘하다. 참 지난한 시간이 흐른 것 같으면서도 돌아보면 훌쩍 흘러버린 시간 같은 느낌. - 하지만 이 소설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나 그래서 너무 유의미한 것.
-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고 다른 내가 다른 시간속에 다른 벽 너머에 있다면
- 내가 생각하는 나도 나고 다른 어딘가에 있는 나도 나라면
- 아리송한 세계관과 술술 읽히기만 꼼꼼히 읽어야하는 이야기. 그리고 때때로 묵직한 문장들.
- 768쪽인줄은 모르고 샀다. 찬찬히 읽다보니 드디어 다 읽게되었다. 이게되네?
p. 234
긴 꿈에서 깬 건 날이 밝기 전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둑하다. 그것이 꿈이었음을 인식할 때 까지 — 그 꿈의 세계에서 내 몸을 완전히 걷어내어 이쪽 현실로 가져올 때까지 — 시간이 걸렸다. 미묘한 중력의 조정 같은 것이 필요했다.
p. 349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개 예상도 못했을 때 일어난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죽음이란, 인생에서 제법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p. 359
“당신은 아직 이렇게 살아 계시지요.” 고야스 씨가 말했다.
“그러니 부디 목숨을 소중히 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아직 검은 그림자가 달려 있으니까.”
p. 427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현재의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애 섞여든 듯한 기묘한 감각이다.
아니면 나인 척하는, 내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거울 속에서 마주보는 건 내가 아닌 나인지도. 영락없이 나처럼 보이는, 그리고 나와 똑같은 동작을 하는 다른 누군가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도 없지는 않다.
p. 452
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p. 744
“아마 낙하를 막을 방법은 찾을 수 없겠죠.”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피할 방법이 없진 않아요.”
“이를테면 어떤 거지?”
“믿는 겁니다.”
“무엇을 믿는데?”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p. 754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년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이 방의 이 작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마음으로 그렇게 원하고, 그대로 단숨에 불을 끄면 돼요. 힘차게 한 번 불어서. 그러면 다음 순간, 당신은 이미 바깥세계로 이동해 있을 겁니다. 간단해요.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처럼 굳이 그 웅덩이까지 찾아가 몸을 던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세계에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p. 758
내 몸이 반쯤 투명해져버린 기분이었다. 중요한 무언가가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영원히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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