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례 내게 왔고, 그만큼 나를 피해 갔던 오래된 꿈. 모든 단어들이 적군처럼 줄지어 있다. 나는 수세에 몰리면서도 차례차례 그것들을 무찔러야 한다. 이미 기운 전세, 수많은 적에 대항하는 펜! 셀 수 없이 많은 적들이 숨어서 급습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그 순간만을 기다린다. 승리를 장담한다. 그들은 나를 노리고 염탐하며 시간을 보낸다. 시간을, 나에겐 없는 바로 그 시간을. 시간을 너무 많이 잃어 이제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기에, 나는 활약을 할 수도, 관대함을 보일 수도, 낭비할 수도 없다. 나는 나 자신을 방어하고, 지키고, 동시에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 정면으로 돌진하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 나는 투입할 부대도, 아무도 없이, 믿을 거라고는 경계심뿐이니까. 나는 저 적들을 안다. 오래전부터 우린 서로 냄새를 맡고, 엄폐하고, 가늠해왔다. 처음은 쉽다. 단어들은 의미하는 바 그대로이고, 저희들을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는 듯 고분고분하게 원하는 순서대로 놓인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것들은 이유를 물으려 하고, 반항하고, 모든 의미로부터 달아나고, 줄지어 있기를 거부하고, 철길을 눈앞에 둔 말처럼 굴복하거나 잠자코 있거나 그대류 굳어저히기를 그만둔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는 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길을 되돌려야 했던가? 셀 수조차 없다. (후략)
P. 117-118
어제 너에게 보낸 글을 분명 나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동시에 창작과 얽힌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호소 이기도 해. 너는 다른 이들보다 잘 알고 있지. 창작은 먼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그다음은 본질과의, 그리고 모두와의 싸움이야. 영감을 기다리는 평화로운 천재라는 것을 나는 믿지 않아. 진짜들은 순교자에 가깝지.
P. 120
내가 이브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여러분이 그에 대해 생각할 때, 그는 분명 같은 인물이며 동일한 남성이지만, 우리 개개인은 개별적인 관계로 만들어진 추억과 함께 기억을 간직하기 마련이지요. 이제 나는 이브의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는 예술가이고, 예술가들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다릅니다. 우리 곁에 있은 작품들을 통해 그들은 끝없이 다시 태어나지요.
P. 148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Pierre Bergé
옮긴이: 김유진
한 권이 책이 나올 정도로 한 사람에게 편지를 쓸 만큼 특별한 사람이 인생에 존재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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