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시절은 부덴가세 거리가 내다보이는 김 서린 창문이었다.
남들보다 빨리 외운 구구단 표였다.
처음에서 커서 헐렁거리다가 나중에는 작아서 꽉 끼게 된 신발을 신고 걷던 등굣길이었다.
손톱으로 참수시킨 개미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설교대에 올라 성경 구절을 읽던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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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시절은 입속에 감추어 놓은 1페니 동전이었다.
동전의 짭짜름하고 톡 쏘는 맛에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눈을 감고 혀로 동전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밀면 밀수록 동전은 당장이라도 목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 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
내 유년시절은 베개 아래 쌓아둔 책들이자 아버지와 함께 부르던 전래동요이자 광장에서 하던 술래잡기 놀이이자 크리스마스에 먹는 슈톨렌 케이크이자 동물원 소풍이었다.
로셀로 포스토리노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원제: Le Assaggiatrici), 2018
문예출판사
2019.12.
424쪽
130*188mm
448g
영화 '조조래빗'을 보고 당시와 관련된 책 몇 권들 중 첫 번째로 읽은 책이다. 소설이긴 하지만 실제 인물의 고백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주인공 로자의 시점에서 써내려가는 이야기는 그 당시가 현재로 그려지고 그 현재에서 생각하는 과거의 이야기가 교차로 이어진다. 문단이나 챕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형식이라 다소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어투가 차분하고 정돈되어 있고, 표현이 세심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비극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에 대한 상세한 표현은 책읽는 이로 하여금 입에 군침을 돌게 만든다. 음식에 대한 표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신체 감각의 변화까지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어 냄새만 나지 않을 뿐이지 공복에 읽는다면 살짝 괴로울 수도 있다. 이게 어쩌면 이래도 되나 하는 로자의 감정을 독자에게 까지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로자의 어릴적 과거 회상은 어린아이여서 할 수 있었을 법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역사적 기록물이 아닌 소설이어서 어떤 평범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나는 하얀 셔츠 칼라 아래 까만 스카프를 매는 것이 싫어서 독일소녀연맹에 가맹하기 싫었다.' 라던지 '그날 밤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계단을 뛰어내려 가면서 나는 공습경보 소리가 무슨 음일까 생각했다.'같은 내용들. 엉뚱한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는 했을 법한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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